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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 진주 가야 고분은 어떻게 망가졌나

2018-06-22

이도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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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최근 가야사가 재조명 받으며 발굴과 복원 사업에 대한 관심이 뜨겁습니다. 진주에도 가야의 흔적은 곳곳에 있는데요.
(여) 하지만 1000년의 세월 앞에 끄덕 없던 가야 고분이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순식간에 훼손됐습니다. 일제 시대, 진주 가야 고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이도은 기자입니다.

【 기자 】
전국 가야 고분의 82%가 있는 경남.

진주 역시도
경상남도기념물 제1호인 옥봉 고분을 비롯해
여러 유적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진주를 다스렸던
가야 지배자의 흔적은 처참하기만 합니다.

[SU]
"가야 고분 주변 입구 모습입니다. 잡목과 빈집 그리고 생활폐기물로 고분이 있는 곳인지 알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진주의 가야 고분들은
이지경에 이르렀을까.

시간은 일제강점기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10년 문화재를 조사한다는 명분으로
진주에 들어온 동경대 교수 세키노 타다시와
그의 일행들.

[CG]
진주 수정봉, 옥봉 봉우리를 따라 분포한
7개의 대형 무덤을 발견하고는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삽과 괭이로 고분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CG END]

전문가들은 당시 일본인들에 의한 조사 과정이
유물을 채집하기 위한
사실상 도굴 방식이었다고 입을 모읍니다.

▶ 인터뷰 : 강동석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 "합법적인 도굴. 심하게 얘기하면 그 정도 수준이었죠. 그러니까 구덩이를 파는 형태, 보물찾기 식의 그런 발굴들이"
▶ 인터뷰 : 강동석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 "졸속으로 이뤄졌고 고분 내에 있는 수많은 유물들을 약탈해 갔었죠."

진주 가야 고분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일본인에 의해 훼손되기 시작한 고분들은
도굴꾼들과 지역사회의 무관심으로 인해
더욱 망가집니다.

▶ 인터뷰 : 송영진 / 경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진주의 가야 왕릉은 이렇게 사진에 보다시피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 인터뷰 : 송영진 / 경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그런데 1910년 세키노 타다시 교수 일행의 조사가 끝나고 지금까지 100년 정도 시간이 흘렀는데요."
▶ 인터뷰 : 송영진 / 경상대박물관 학예연구사
- "지금은 그 형태를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하게 진행됐습니다."

[CG]
심지어 아예 사라진 고분도 있습니다.
줄지어 나란히 있었던
옥봉, 수정봉 7개의 고분들 중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은 3개의 고분 뿐.
[CG END]

숲에 묻히고
집과 도로에 덮여 확인조차 불가능 합니다.

[CG]
그나마 형태를 유지해 남아있는 고분조차도
고분의 위 부분에 해당하는 봉분만
울타리 쳐져 있습니다.
[CG END]

고분의 천년 역사가 무색 할 만큼
순식간에 망가진 진주의 가야 고분들.

가야사가 새롭게 조명 받고 있는 만큼
지역에 묻혀진 가야사 유적을 보호하기 위한 관심이 하루빨리 모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습니다.

SCS 이도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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