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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R) 일제 탄압에도 재차 일어났다..하동 항일운동

2019-02-14

조진욱 기자(mudcho@sc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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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3.1 운동 100주년을 앞두고 서부경남의 3.1운동사와 항일운동의 기록을 살펴봅니다.
(여) 이 시간에는 영호남 주민이 함께하고, 제2의 항일운동까지 펼쳐진 하동 지역을 살펴봅니다. 조진욱 기잡니다.

【 기자 】

"최후의 1인과 최후의 일각까지
폭동과 난거(亂擧)는 행치 말고
인도와 정의로 독립문으로 전진합시다.

1919년 3월 18일.
당시 하동장터에서
울려 퍼진 대한독립선언섭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몇 안 되는 자주적 독립선언선데,
하동군민들의
독립의지와 저항의식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지금의 하동읍사무소 인근으로
알려진 옛 하동장터.

3월 13일, 이곳에서
하동의 만세운동이
처음 시작됐습니다.

5일 뒤 적량면장 출신인
박치화 선생이
같은 장소에서
독자적으로 작성한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했고,
1,500여 명의 군중들은
일제를 규탄하며
'대한독립만세'를 목놓아 외쳤습니다.

이후 하동의 대부분 지역에서
산발적으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 인터뷰 : 정연가 / 하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 "우리 관내 시장을 중심으로 운동이 많이 일어났어요. 옥종시장, 고전시장, 진교시장 곳곳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는데"
▶ 인터뷰 : 정연가 / 하동독립운동기념사업회 회장
- "그 열기가 이 근방에서는 가장 거셌다고 알려졌습니다. "

특히 4월 6일과 11일
화개장터에서는
인근 광양 등 호남지역 주민들도
하동군민들과 함께
만세를 외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두 달 가량 이어진
하동 만세운동은
모두 17차례 진행됐습니다.

모인 군중은
만2천 명 정도로 추정됩니다.

최근에는
또 한번의 항일운동이
세상 밖으로 드러났습니다.

1927년 3월 3일
하동장터에서 열린 시위인데,
만세를 외쳤단 기록은 없지만
군중 천여 명이 모여
조선민족 억압 법령 철폐 등을 요구했습니다.

▶ 인터뷰 : 정재상 /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
- "3.1운동 이후에 영호남 지방에선 가장 큰 시위였다... 그때 천명 정도 시위에 참여했는데 인근 광양 지역에 있는"
▶ 인터뷰 : 정재상 /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
- "분들도 대거 참여를 하게 되고 50명이 체포가 돼서 재판에 넘겨집니다. 이후 13명이 옥고를 치룬 기록들이 있습니다."

독자적 독립선언서와
영호남이 함께한 만세운동,
8년 뒤 펼쳐진 대규모 항일 시위까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항일운동의 화수분이었던 하동이
더욱 주목받고 있습니다.

scs 조진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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