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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R-1) 100년 전, 진주 함성.."전국 두 번째로 컸다"

2019-01-16

차지훈 기자(zhoons@sc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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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 올해는 3.1운동 10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지역 곳곳에서 3.1운동 정신을 기리고 그 가치를 찾으려는 노력들이 분주한데요.
(여) 서경방송에서는 100년 전 진주에서 벌어진 진주 기미년 만세운동의 다양한 이야기들을 기획보도로 전해드립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순서로 진주 만세운동 당시 진행 상황과 규모 등을 보다 자세히 살펴봅니다. 차지훈 기자입니다.

【 기자 】
진주의 한 시골마을.
마을 한 켠에 태극기가 걸려있고,
그 아래 비석엔 '진주 3.1운동 발상지'라는
글이 적혀 있습니다.
1919년 당시, 고종 황제 장례식에
참석하려고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을 직접 보고 온 김재화 선생의
생가가 바로 이 마을에 있습니다.

[ S/U ]
"3.1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고향으로 내려온 김재화 선생은 자신의 집에서 비밀회합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곳에서 진주의 항일시위를 결의한 것입니다."

김재화 선생 등 뜻을 같이 한 이들은
교유문을 작성하고 만세운동을
비밀리에 준비했습니다.
한 차례 연기 끝에 3월 18일 정오에
진주교회 종소리에 맞춰
일제히 진주에서 만세운동이 시작됐습니다.

(CG) 당시 일제의 재판 기록,
경찰 기록 등에 따르면
18일 진주교회에선
박진환, 이강우 등이 주도해 시위에 나섰고,
중앙시장과 재판소, 촉석공원,
현 진주초등학교 자리의 매립지와
대안동, 촉석루, 봉곡동 등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이 시작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이날 정촌면 5,000여명의 군중도
합세하기 위해 진주 도심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진주 도심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은
곳곳으로 확대돼
그 해 5월까지 연 인원 3만 명이
진주 만세운동에 참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진주 뿐만 아니라 서부경남 전체
만세운동이었다는 주장이 나옵니다.

▶ 인터뷰 : 추경화 /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
- "주동자 중에서도 서부경남 여러 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는 그날 장날이니까, 그 당시는 진주 장날 그러면 하동, 사천,"
▶ 인터뷰 : 추경화 /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
- "남해, 함양, 산청에서 다 내려오니까 한꺼번에 많이 모일 때 만세를 부르면 효과가 있으니까..."

당시 진주는 경남도청 소재지였고,
만세운동 시위의 최종 목적지 역시
진주성 내 옛 도청 앞 광장이었다는 점에도
주목해 봅니다.

▶ 인터뷰 : 강동욱 / 진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진주문화사랑모임 상임이사
- "많은 군중들이 도청 정문 앞으로 만세를 부르며 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가 적어도 3.1만세의거 당시에 2만~3만의"
▶ 인터뷰 : 강동욱 / 진주문화원 향토문화연구소장·진주문화사랑모임 상임이사
- "진주 백성들이 모여서 대한독립만세를 힘차게 외쳤던 곳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참가한 만큼
곳곳에서 붙잡힌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 인터뷰 : 추경화 /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
- "진주 300명만 잡혀 간 것이 아니라 서부경남은 전부 다 진주 감옥에 가둬놨으니까 콩나물 시루처럼 전부 서가지고"
▶ 인터뷰 : 추경화 / 진주문화원 향토사연구실장
- "잠을 잘 정도로 가둬놓고 하나씩 하나씩 취조를 해가지고... "

진주 만세운동이 시작된 지
한 달째가 되던 4월 18일, 진주에선
시위를 주도했던 24명에 대한
첫 재판이 진행됐습니다.

(CG) 첫 재판 상황과 분위기는
당시 기사를 통해 살필 수 있습니다.
이날 재판장 주변으로 3천명의
시민들이 몰려왔고
거센 저항과 방청 금지, 해산 조치 등
격앙된 분위기 속에
재판이 진행됐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일제에 의한 재판은 대부분 유죄로 마무리됐고,
이들을 기다리는 건 바로 모진 고문이었습니다.

▶ 인터뷰 : 강호광 /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
- "김재화 선생과 권채근 선생은 대구형무소 재소 중에 심한 고문과 무리한 옥고로 인해서 병환이 깊어지는 바람에 가출옥하게"
▶ 인터뷰 : 강호광 /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회원
- "되거든요. 병보석으로요. 그래서 집으로 돌아온 지 며칠 만에 이듬해인 1920년 4월에 순국하신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특히 재판장에 섰던 24명 가운데
기독교인, 진주교회와 연관된 인사만 9명.
이는 진주교회 호주 선교사 등을 중심으로
진주에선 이미 교육과 의료 분야 등에서
사회 계몽 운동.선진화 바람이
불고 있었다는 것과도 연결됩니다.

▶ 인터뷰 : 김중섭 /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누가 (진주에서) 3.1운동을 일으켰는가 거기에는 물론 지역의 활동가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그런데 못지 않게"
▶ 인터뷰 : 김중섭 / 경상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 "호주 선교회가 진주에 와서 뿌린 씨앗이 크게 작용했다고 생각을 해요."

▶ 인터뷰 : 조헌국 / 진주교회 장로·전 진주교육장
- "나중에 일본이 신사를 세워가지고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교인들은 거기에도 저항을 해가지고 나중에 학교(광림학교)가"
▶ 인터뷰 : 조헌국 / 진주교회 장로·전 진주교육장
- "신사참배 반대를 하다가 폐교가 되는 어려움도 겪었습니다. "

진주를 중심으로 서부경남에서
3만 명이 참가한 진주 기미년 만세운동.
경남을 대표하는 만세운동으로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SCS 차지훈입니다.

[ END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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