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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션R)우리이웃이야기-애국지사 정규섭 옹

2015-08-14

김길연 기자(gy1387@sc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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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일제로부터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건 투쟁을 하셨던 분들 덕분인데요.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부경남의 유일한 항일 애국지사를 김길연 아나운서가 만나고 왔습니다.

【 기자 】

굳고, 높게 뻗어 있는 진주의 충혼탑 앞.
경건한 분위기 속에 한 노인이 말 없이
참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70여 년의 세월이 지나
꿈 많던 소년은 구순을 바라보는 노인이 되었고, 서부경남에서 유일한 항일 애국지사로 남았습니다.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그 때 우리가 같이 행동 했던 것이 지금 현재도 눈에 삼삼합니다. 아주 그립고 참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패전 막바지에 처한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이 심해진 1944년.
당시 17살이었던 정규섭 옹은
진해비행장 건설공사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었습니다.

갖은 중노동에도 불구하고,
'광명회'라는 단체를 조직해
주위 학생들에게 우리말 사용을 생활화할 것과
독립군의 활약상을 전파하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했습니다.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형무소를 같이 가서 한 명이 죽었어요. 공부도 하고, 토론 도 하고, 항상 토론하는 주제가 말하자면 시대(일제강점기)가"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이러하니까... 그 때는 중국으로 가려는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독립운동을 하고자) 망명을 해..."



광명회 활동은 오래가지 않아 헌병대에 적발됐고, 온갖 체벌과 고문을 당해야 했습니다.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몽둥이를 가지고 50대씩 궁둥이를 친다든지, 또 제일 아픈 것이 연필을 (손가락 사이에) 다섯 개를 찔러가지고, 꽉 눌러버리면"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손가락이) 부러지려고 하거든요. 그것이 굉장히 아프더라고요. 아프고..."


하지만 조국을 되찾기 위한 싸움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해방 직전 병보석으로 풀려 난 정규섭 옹은
해방 후, 한민족이 겪었던 수난의 역사를 마감하는 것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하고 교단에 섰습니다.

또 진주향교 전교를 맡으면서
인재 육성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이후 '광명회'의 업적이 알려지면서 독립유공자로 인정받고 대통령 표창도 받았습니다.

광복 70주년을 쓸쓸히 혼자서 맞이하게 된 정규섭 옹은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며
이제 미래의 대한민국을 위한 당부를 합니다.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많습니다.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 인터뷰 : 정규섭 / 독립유공자
- "우리 젊은이들이 마음을 가다듬어 가지고, 일치단결해 모든 일을 대할 때 나라를 위한 일로써 임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일제에 항거한 애국지사이자,
인재육성을 위한 교직자이며,
한민족의 자긍심 고취를 위해 평생을 바친
진주선비 농운 정규섭 옹,

그의 정신이 영원히 우리 나라에
서리길 바랍니다.

우리이웃이야기
김길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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